두 신문이 내보낸 사설에 우리 언론의 부끄럽고 참담한 현실과 문제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첫째, 두 신문은 이재용 회장이 19개 혐의 모두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주요 공소 사실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각종 부정 거래와 시세 조종, 회계 부정 등에 관여한 혐의’라고만 소개했고, 매일경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했다는 혐의’라고만 적었다. 이 두 사설만 본 독자들은 이재용 회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불법 행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돼 있다.
이재용 회장에 대한 공소 사실에는 ▲거짓 정보 유포 ▲중요 정보 은폐 ▲허위 호재 공표 ▲주요 주주 매수 ▲국민연금 의결권 확보를 위한 불법 로비 ▲계열사인 삼성증권 조직 동원 ▲자사주 집중매입을 통한 시세조종 등이 들어있다.
사설은 르포나 뉴스 보도와 다르다. 르포는 어떤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인과관계(cause and effect)를 설명(explanation)하지 않고, 본대로 사진을 찍듯이 묘사(description)하면 된다. 뉴스 보도는 사건에 대한 묘사, 즉 사실을 바탕으로 인과관계를 설명하면 되고, 사설은 사건에 대한 묘사와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을 토대로 대안이나 해결책 혹은 신문사의 입장을 덧붙이게 된다.
두 신문이 이재용의 공소장에 포함된 19가지 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요 공소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다시 소개하지 않은 것은 사설 작성의 정도는 아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고 본다. 이 또한 삼성과 이재용의 입장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문제의 두 신문은 사설에서 삼성전자(회사)와 이재용 회장(주주)의 이익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동일시는 사실에 배치될 뿐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먼저 사실을 보자. 삼성전자 주식 0.7%를 소유하고 있던 이재용 회장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이뤄진 이후, 삼성전자 주식 4%를 보유한 삼성물산의 주식 16%와 삼성전자 주식 7%를 보유한 삼성생명의 주식 21%를 소유하게 됐다. 이를 토대로 이재용 회장 대주주 일가와 삼성그룹 순환지배구조에 변화를 시도해, 2024년 현재 이재용 회장의 삼성전자의 주식 지분은 0.7%에서 1.6%로 늘어났고, 이재용이 지분 18%를 보유하고 있는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지분은 5%로, 역시 이재용이 지분 10%를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은 9%로 늘어났다. 아버지 이건희 회장 때처럼,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의 주식을 불과 1.6%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가족들이 보유한 우호지분과 삼성생명과 삼성물산을 비롯한 계열사들의 순환구조를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모든 주식회사가 공기업’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와 경영학자들이 많다. 당연히 회사와 경영진, (대)주주의 이익이 100% 일치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대기업의 CEO로 취임하는 전문경영인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소액 주주들에 의한 주주대표소송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두 신문사와 논설위원들이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모를 리 없다. 다만, 이런 사설을 쓴 두 족벌신문사의 논설위원(실)과 주필을 비롯한 기자들이 자신들이 소속한 신문사와 지배주주들과 자신(사원)들의 이익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기자들의 인식이 족벌언론 사주들이 세습하며 왕처럼 군림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셋째, 두 신문의 사설은 또 하나의 중요한 ‘경향성’에 관해 애써 눈을 감고 있다. 바로 ‘오너 리스크(owner risk)’와 주식 시장에서 주가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다. 우리 중에는 과거 이재용 회장이나 다른 재벌 회장들이 불법 혐의로 구속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다음 날 주식시장에서 해당 회사의 주가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르는 경우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런 기억이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의 두뇌 탓일까? 아니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2021년 1월 24일 한국거래소와 인포맥스(연합뉴스 계열사로 경제 정보 분석 제공회사)에 따르면, 과거 재벌그룹 총수들이 수감됐던 대부분 사례에서 주력사 주가가 전체 증시보다 더 많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이후 삼성·SK·현대차·롯데·한화·CJ·오리온 등 주요 그룹 총수가 수감된 9개 사례 중 7개 사례에서 총수 수감 동안 그룹 지주사 등 대표 종목의 상승률이 코스피를 웃돈 것으로 집계됐다는 것이다. 삼성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구속 수감된 2017년 2월 17일 직전부터 2심 집행유예로 풀려난 2018년 2월 5일 직전까지 삼성전자[005930] 주가는 25.46% 올라 코스피(21.31%)를 상회했다.
넷째, 문제의 두 신문은 배치되는 여러 관련 사실들 중에서 사설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만 취사 선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사견을 사실인 것처럼, 그것도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정하고 과장했다.
조선일보의 사설을 보자. 『이 수사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때 시작됐지만 실제 수사를 본격화하고 관련자들을 기소한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심복이던 이성윤 서울지검장이 검찰을 장악했을 때였다. 문 정부의 적폐 몰이와 반기업 풍조가 검찰의 무리한 기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일한 직책에 대해 윤석열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바르게, 이성윤은 ‘서울지검장’으로 틀리게 표기한 잘못은 애교로 넘어가자.
앞에서 설명한대로, 사설은 특정한 견해, 제안이나 해결책 등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근거 없는 추론을 사실인 것처럼 가정해서는 안된다. 이런 가정법은 두 사설 곳곳에 등장한다.
“한국에서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인이 누가 있나. 어쩔 수 없이 대통령 요구를 들어주면 '묵시적 청탁'이라고 처벌한다. 국가를 대표하는 간판 기업을 이렇게 괴롭히고 발목 잡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주요 전략적 의사 결정을 해야 할 기업 총수의 발이 묶인 탓에 글로벌 IT 산업이 활발한 합종연횡으로 재편되는 동안에도 삼성은 차세대 성장 동력 확충을 위한 인수 합병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조선일보)
“스마트폰과 반도체 파운드리에서는 애플·TSMC와 격차가 더 벌어졌다. 검찰의 항소 탓에 세계 시장을 더 빼앗기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만약 사법 족쇄가 없었다면 삼성전자는 더 많은 혁신으로 더 많이 수출하고, GDP 증가에도 더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매일경제)
두 사설만 읽으면, 삼성그룹의 흥망은 오로지 이재용 회장 한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도였을까?
다섯째, 두 신문은 사설에서 3심제도를 채택한 헌법과 사법체계를 사실상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총수를 3년 5개월 동안 형사 피의자로 옭아맨 사건의 결말이 이토록 허망하다. 이런 일로 한국 최대 기업의 발을 이토록 오래 묶은 것이다.” (조선일보)
“검찰이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하면 2심에서 또다시 길고 지루한 법정 싸움을 벌여야 한다. 무려 3년5개월이나 걸린 1심 재판이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가 2020년 6월 이 회장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고 불기소하라고 권고했을 때 검찰은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피해가 최소화됐을 것이다.” (매일경제)
우리 헌법과 사법체계는 3심제도를 채택하고 있고, 형사 피의자의 경우라도 대법원의 확정판결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도록 돼있다. 마찬가지로 이재용 회장에 대해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무죄로 추정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두 신문사는 이재용 회장이 마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처럼 사설을 쓰고 있다.
주가 조작 같은 경제사범의 경우, 미국은 사안에 따라 100년 이상의 징역이 가능하다.
올해 만90세가 됐음에도 여전히 꼿꼿한 걸음걸이로 아들·손자뻘인 후배 언론인들과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한국의 언론을 걱정하는 김중배 선생은 30여년 전에 지금 우리 언론의 부끄럽고 참담한 모습을 예견했던 것일까?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보다,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가 1991년 9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에서 물러날 때 후배 기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준엄한 ‘경고’다. ‘영원한 기자 김중배’의 경고는 주주와 회사의 이익과 기자 자신의 이익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과 주주 자신들의 이익을 동일시하고 우선시하는 족벌언론 사주들을 견제하거나 이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신문은 더 이상 신문일 수 없고 설 땅이 없다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언론은 김중배 선생의 경고는 까마득하게 잊었고, 우려만 현실이 됐다. ‘언론인’이 아니라 ‘회사원’으로 전락한 기자들은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은 커녕, 천민자본주의의 시궁창에서 재벌들이 주는 광고로 연명하며 재벌과 오너 가족 앞에 경쟁적으로 꼬리치는 애완견 역할을 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하다. <끝>